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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관념론과는 차별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인간의 사고와 의식을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물질적 조건의 변화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회의 정신적 상황이 물질적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상황이 정신적 상황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강조했습니다. 특히, 사회의 경제력이 역사의 진보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막스 베버:

역사학파의 일원이었던 막스 베버는 리케르트의 영향을 받아 신칸트학파의 방법론을 따랐습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티즘과 연관 지어 분석한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법학 등 광범위한 학문 분야에서 활동한 그는 근대 사회과학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그의 주요 연구는 종교 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종교가 서구와 동양 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금욕주의적 칼뱅주의가 서구의 법적 권위, 관료제,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처럼 단순히 물질적인 요인(소유관계, 기술, 지식 등)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종교적 이상과 관념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는 국가를 합법적 폭력의 독점 주체로 정의하여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경제와 사회》에서의 관료제 분석은 현대 조직 연구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위를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분류하는 “베버 명제”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 권위에 기반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에밀 뒤르켐:

뒤르켐은 콩트의 실증주의 사회학을 발전시켜 사회학을 경험적 기반 위에 확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콩트가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지만, 그의 역사 발전 단계 이론은 과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뒤르켐은 사회실재론의 입장에서 사회 법칙이 자연과학 법칙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사회를 개인과 분리된 실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간주하라”는 그의 명제는 사회가 객관적인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사회적 사실은 개인 외부에 존재하며 개인에게 구속력(강제성)을 행사합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의무감조차 개인의 자발적 신념이라기보다 사회적 사실이라는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그러한 생각조차 사회적 사실로서 외부에서 주어지며 강제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를 단순한 개인의 집합으로 볼 수 없게 하며, 사회는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생물학이나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인간 본성으로 사회의 성격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아르놀트 하우저:

1892년 헝가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르놀트 하우저는 부다페스트, 베를린, 빈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루카치, 만하임 등과 함께 ‘일요 서클’이라는 지식인 모임을 통해 예술사 연구의 사회학적 방법론과 영화 및 극예술 연구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 붕괴 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고, 나치의 오스트리아 침공 이후에는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여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영국 리드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미국에서도 객원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예술 연구의 방법론》, 《현대 예술과 문학의 기원》, 《예술의 사회학》, 《루카치와의 대화》 등이 있습니다.

오귀스트 콩트:

실증주의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는 ‘실증주의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 이공과대학교에서 진보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생시몽의 비서로 활동하며 유토피아 사회주의 발전에 협력했습니다. 이후 수학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1848년 실증주의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생시몽 사상의 실증주의적 측면을 발전시킨 것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프랑스에서 질서와 진보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평등주의, 개인주의, 정치적 주권주의 등 혁명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철학에 반대했습니다.

그의 저작에는 당시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 있습니다. 콩트는 공동 가치 체계로서의 사회 질서라는 보수적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유럽의 전통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 쇠퇴가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증주의를 통해 사회 개혁과 합의 재건을 위한 윤리적, 지적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그의 실증주의가 객관적 사회 개념에서 개혁주의, 인류주의, 종교에 대한 주관적 강조로 변질되었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이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과학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단순한 경험주의로 환원될 수 없으며, 고전 경제학의 추상성, 형이상학적 사고, 경제적 사실의 부당한 고립 등을 비판했습니다. 콩트의 사상은 프랑스의 레비브륄, 뒤르켐, 알랭, 모라, 영국의 스펜서, 밀, 레키, 몰리, 독일의 몸젠, 그로트, 그리고 스페인, 포르투갈, 남아메리카의 학문 사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사회 재조직을 위한 과학적 작업》, 《실증 철학》, 《실증 정치 체계》, 《실증 정신론》 등이 있습니다.